엡 1:15-23, 왜 여전히 두렵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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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시리즈 4
눈이 열려야
보이는 것들
보이는 것들
What Only Opened Eyes Can See
- 주일설교 요약본 -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1:18–19
■ 진단의 문제 — 우리는 틀린 병명을 달고 삽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인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에게 진정으로 진지한 철학적 질문은 단 하나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그는 이것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 의미가 없다면 계속 살아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카뮈 자신의 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반항하라. 의미 없는 우주에서 의미를 스스로 창조하라." 그는 그것을 시지프의 신화로 표현했습니다. 끝없이 굴러 내려오는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는 시지프. 그러나 카뮈는 말합니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 답이 얼마나 오래 버텨낼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몸이 병들어 침대에 누웠을 때,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을 때 — 내가 만든 의미는 그때도 버텨낼 수 있습니까? 스스로 만든 의미는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가장 먼저 무너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불안합니까?
왜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불안합니까?
교회를 20년 다닌 분이 여전히 성과로 자신의 가치를 가늠합니다.
성경을 매일 읽는 분이 통제력을 잃을까 봐 밤잠을 못 잡니다.
매일 기도하는 분이 비판 한마디에 하루 종일 무너집니다.
성경을 매일 읽는 분이 통제력을 잃을까 봐 밤잠을 못 잡니다.
매일 기도하는 분이 비판 한마디에 하루 종일 무너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이렇게 진단합니다. "믿음이 약하다." 그러면 처방은 자연스럽게 이것이 됩니다. "더 열심히 믿어라. 더 많이 공부해라. 더 자주 기도해라." 저는 오늘 이 진단이 틀렸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적어도 불완전합니다. 왜냐하면 더 많이 아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가슴 가장 깊은 층에서 실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머리에 있는 진리가 삶의 실제가 되려면, 정보가 더 쌓이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더 정확한 언어로 표현합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 에베소서 1:18
바울이 구하는 것은 새로운 정보가 아닙니다.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구하는 것은 새로운 정보가 아닙니다.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다릅니다. 지식은 머리에 쌓이지만, 봄은 마음을 바꿉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더 많이 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전부입니다.
■ 바울의 기도 — 가장 이상한 기도문
에베소 교회가 처한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에베소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카이사르의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있었습니다. 황제를 신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이탈이 아니라 정치적 반란이었습니다. 사회적 낙인, 경제적 배제, 때로는 목숨의 위협 — 이것이 에베소 교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 교인들에게 바울은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박해를 멈춰달라고, 상황을 바꿔달라고 기도할 법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에베소서 1:17-18
바울이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황의 변화가 아닙니다. 박해의 중단이 아닙니다. 재정의 공급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하나를 구합니다.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을 구합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을 구합니다.
열왕기하 6장의 엘리사를 기억하십니까? 아람 군대가 성을 에워쌌을 때 엘리사의 종은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그때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눈을 여시자, 불말과 불병거가 보입니다. 아람 군대는 그대로입니다. 위협도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보는 것이 바뀌었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바울의 깊은 신학적 확신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불안한 것은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결정적으로 행하신 일이 있는데, 우리의 눈이 닫혀 있어서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눈이 열릴 때,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됩니까?
■ 눈이 열리면 보이는 세 가지
바울은 눈이 열리면 명확하게 세 가지가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가 보이는 사람은 같은 현실을 전혀 다르게 살아냅니다.
Point 01
부르심의 소망
내가 어디로 가는지 봅니다
Point 02
기업의 영광
내가 얼마나 귀한지 봅니다
Point 03
지극히 크신 능력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봅니다
첫째 — 부르심의 소망: 내가 어디로 가는지 봅니다
이것은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항해사를 생각해보십시오. 폭풍 속에서 배가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에게 목적지가 있고 나침반이 있습니다. 폭풍이 그를 흔들 수는 있어도 방향을 잃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나를 부르신 분이 계시고 그분이 정하신 목적지가 있다는 것이 보이는 사람은, 폭풍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단순히 천국에 간다는 정보가 아닙니다. 나의 삶 전체에 방향과 무게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살아 있다는 확신입니다.
둘째 — 기업의 영광: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봅니다
바울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기업'이라는 단어를 눈여겨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언어를 정밀하게 읽으면, 하나님이 성도들을 자신의 기업으로 여기신다는 선언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이 바로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포이에마(ποίημα)', 곧 그분의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포이에마(ποίημα)', 곧 그분의 걸작품입니다.
성과가 없어도, 인정받지 못해도, 우리의 가치는 우리를 만드신 분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눈이 열린 사람은 이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것이 보일 때,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불안의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셋째 — 지극히 크신 능력: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봅니다
바울은 막연하게 '하나님은 능력이 크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 능력이 미래의 약속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어떤 크기입니까? 바울은 그 기준으로 놀라운 것을 제시합니다.
■ 비교 기준은 부활입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의 크기를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비교 기준이 무엇입니까? 건물이 아닙니다. 군대가 아닙니다.
부활입니다.
죽음을 이긴 능력. 무덤을 열어버린 능력.
바로 그 능력이 지금 믿는 우리에게 베풀어져 있습니다.
바로 그 능력이 지금 믿는 우리에게 베풀어져 있습니다.
1세기 에베소 사람들에게 이 선언의 충격을 상상해보십시오. 당시 가장 강력한 이름은 로마 황제 카이사르였습니다. 그 제국 안에서 박해받는 소수 집단에게, 바울은 선언합니다. "카이사르의 이름 위에, 아우구스투스의 이름 위에, 로마 제국의 모든 권세 위에 그리스도가 앉아 계십니다." 이것은 신학 강의가 아니라 가장 실제적인 용기의 근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솔직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 능력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연약하고 두렵습니까? 이 질문을 피해 가면 설교가 공허해집니다. 바울도 이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 연합의 논리 — 그 능력이 어떻게 우리에게 옵니까?
답은 에베소서 1장 22-23절의 두 단어에 있습니다. '머리'와 '몸'. 바울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선언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비유가 아닙니다. 능력이 흐르는 경로에 대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논리를 따라가보면 이렇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능력이 완벽하게 작동했습니다. (역사적 사건)
2
그 그리스도가 바로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권위와 공급의 원천)
3
교회는 협력 단체가 아닌 그분의 몸입니다. (연합의 실재)
4
따라서 머리가 가진 권세와 능력이 몸으로 그대로 흐릅니다.
신자는 능력을 스스로 생산하는 자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능력을 '연결을 통해 공급받는 자'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은 힘을 쥐어짜기 때문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연합을 통해 흐르는 능력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입니까?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해야 합니다.
❌ 세상이 말하는 능력 (번영신학적 오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즉시 뽑아내는 도구
상황이 내 맘대로 즉각 바뀌어야 함
내 욕망 성취를 위한 수단
상황이 내 맘대로 즉각 바뀌어야 함
내 욕망 성취를 위한 수단
✅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능력
견딜 수 없는 고난 안에서 인내하는 힘
극심한 두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하는 힘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소망을 잃지 않는 힘
극심한 두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하는 힘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소망을 잃지 않는 힘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솔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난은 능력이 없다는 증거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승리를 안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라고 부릅니다.
이미 (ALREADY)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이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아직 (NOT YET)
그 능력의 완전한 영광은 새 창조의 날에 완성됩니다.
지금 이 시대 (NOW)
우리는 그 사이에서 연합으로 능력에 참여합니다.
고난은 '정죄'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훈련과 증언'의 자리가 됩니다.
다시 말해, 눈이 열린다는 것은 고난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을 다르게 본다는 뜻입니다. 아람 군대는 그대로였지만, 엘리사의 종은 다른 눈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스스로 눈을 열 수 없습니다. 만일 눈을 여는 것이 우리의 노력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또 다시 지칠 것입니다. 바울이 '이미' 모든 것을 얻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듯이, 눈이 열리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능력을 만들려 하지 말고,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만물 위에 앉아 계십니다. 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신 그 능력이 지금 여러분 안에 베풀어져 있습니다. 이 기도가 응답될 때, 여러분은 같은 세상을 살면서 다른 눈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보는 것이 바뀔 때, 사는 것이 바뀝니다.
만물 위에 앉으신 그리스도,
우리의 머리 되신 그분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삶을 축복합니다.
우리의 머리 되신 그분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삶을 축복합니다.
아멘.
PRAYER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아는 것과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보는 많지만, 정작 하나님을 실제로 보는 눈은 너무나 흐릿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보는 많지만, 정작 하나님을 실제로 보는 눈은 너무나 흐릿합니다.
오늘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상황을 바꿔달라는 간구에 머무르지 않고, 내 마음의 눈을 열어달라는 기도를 드리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임을,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져 있음을 보게 하옵소서.
상황을 바꿔달라는 간구에 머무르지 않고, 내 마음의 눈을 열어달라는 기도를 드리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임을,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져 있음을 보게 하옵소서.
상황이 어렵고 많이 지쳐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릴 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만물 위에 앉으신 그분이 우리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몸이라는 사실을.
능력을 쥐어짜 내려 하지 않고, 주님과의 연합 위에 굳게 서게 하옵소서.
만물 위에 앉으신 그분이 우리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몸이라는 사실을.
능력을 쥐어짜 내려 하지 않고, 주님과의 연합 위에 굳게 서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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